그리고 이렇게 행복으로 가득 찬 앤의 마음은 매슈로 인해 최고에 이르렀다. 카모디에 있는 가게에 갔다 이제 막 돌아온 매슈는 쑥스러운 듯 주머니에 작은 꾸러미를 꺼내 마릴라의 눈치를 살피며 앤에게 건넸다.
"네가 초콜릿 과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좀 사왔단다."
마릴라가 코웃음을 쳤다.
"나 참, 그런 건 이와 위장에 나빠요. 이런, 이런, 그렇게 울상 짓지 마라, 애야. 매슈 아저씨가 이와 사오셨으니 몇 개는 먹어도 된다. 박하사탕이 몸에 더 좋긴 하다만 말이다. 한꺼번에 다 먹고 배탈이나 나지 않게 하렴."
앤이 생기있게 말했다.
"어머, 아뇨. 안 그래요. 오늘 밤엔 하나만 먹겠어요, 아주머니. 절반은 다이애나한테 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다이애나에게 반을 준다면 나머지 절반은 두 배로 더 맛있을 거에요. 다이애나에게 줄 게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뻐요."
앤이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마릴라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인 말이죠, 인색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전 인색한 아이가 제일 싫거든요. 이거야 원, 저 아이가 온지 겨우 3주밖에 안 됐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같이 살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저 애가 없는 집은 이젠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러게, 내가 뭐랬니.' 하는 표정은 짓지 마세요, 오라버니. 여자가 그래도 기분 나쁜데, 남자가 그러는 건 더 못참아요. 어쨋든 솔직히 털어놓자면, 오라버니 뜻대로 아이를 데리고 있길 잘했다 싶어요. 저 아이가 점점 좋아지는군요. 하지만 이 일 가지고 계속 놀려 댈 생각은 말아요, 매슈 오라버니."
"음, 그게 어떤 것이든 그 아인 거룩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틀림없이 좋은 뜻일 거예요. 아저씨는 거룩한 아름다움이라는 게 어떤건지 상상해 본 적 있으세요?"
"글쎄다, 아니, 없단다."
매슈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전 가끔 상상하곤 해요. 거룩하게 아름다운 것과 눈부실 정도로 머리가 똑똑한 것과 천사같이 착한 것 중에서 아저씨는 무얼 고르시겠어요?"
"글쎄다, 난, 난 잘 모르겠구나."
"저도 그래요. 도무지 고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차피 제가 될만한 것도 없어 보이니 고르지 못한대도 상관없겠죠. 확실한 건, 제가 천사같이 착한 아이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에요. 스펜서 아주머니 말로는...... 어머, 아저씨! 어머! 어쩜 좋아."
그것은 스펜서 부인이 한 말이 아니었다. 아이가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거나 매슈가 깜짝 놀랄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길모퉁이를 돌아 '가로수길'로 접어들었을 뿐이었다.
'가로수길'이란 뉴브리지 사람들이 이름 붙인 4,500미터 되는 길로서, 수년 전 어떤 나이든 괴짜 농부가 길 양쪽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들이 크고 넓은 가지를 뻗어 완전한 아치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눈처럼 하얗고 향긋한 꽃들이 하늘을 지붕처럼 덮은 채 길게 뻗어 있엇다. 커다란 가지 아래엔 자줏빛 황혼이 가득했고, 멀리 앞쪽으로는 대성당의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장미 문양의 창처럼 아름답게 물든 하늘이 살짝 내다보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이 아이의 말문을 닫게 한 것 같았다. 아이는 마차에 등을 기대고 야윈 손을 모아 쥔 채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꽃을 황홀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차가 길을 빠져나와 뉴브리지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갈 때가지 한마디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기쁨에 가득찬 얼굴로 저 멀리 노을 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불타는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흘러가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개들이 짖어 대고, 사내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창밖을 빤히 내다보는, 시끌벅적한 뉴브리지의 작을 마을을 지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5킬로미터를 더 갔는데도 아이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아이는 말을 잘하는 만큼이나 침묵을 지키는 것 도한 거뜬히 해낼 수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매슈가 용기를 내어 아이가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말을 던졌다.
"꽤 지치고 배가 고픈가 보구나.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단다. 1.5킬로미터만 더 가면 되니까."
아이가 숨을 깊이 내쉬면서 공상에서 깨어나더니, 별을 따라 머나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 같은 몽롱한 눈길로 매슈를 바라보았다.
여자 아이가 속삭였다.
"아, 아저씨. 우리가 지나온 저기, 저 하얀 곳의 이름이 뭐죠?"
매슈가 무슨 말인가 싶어 잠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가로수길'을 말하는 게로구나. 아주 예쁜 길이지."
"예쁘다고요? 어머, 예쁘다는 말말으론 모자라요. '아름답다.'는 말도 맞지 않아요. 그런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고요. 아, 그래요, '황홀하다.' '황홀하다.'가 좋겠어요. 제가 더 멋지게 상상할 수 없었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아이가 가슴에 한 손을 대며 말을 이었다.
"아주 이상야릇한 통증이 왔어요. 하지만 기분 좋은 통증잉었어요. 아저시도 이렇게 기분 좋은 통증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글쎄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전 많이 있었어요. 고상하게 알므다운 걸 볼 때면 늘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그냥 '가로수길'이라고 불러선 안돼요. 그런 이름은 아무런 뜻도 없으니까요. 음, 이렇게 부르는게 좋겠어요. 기쁨의 하얀 길.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멋진 이름 같지 않아요? 전 장소나 사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고아원에 있던 헵지바 젠킨스라는 여자 아이도 조잘리아 드 비어라고 항상 상상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거길 가로수길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전 언제나 기쁨의 하얀 길이라고 부르겠어요. 정말 1.5킬로미터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하난요? 전 기쁘면서도 섭섭해요. 오늘 길이 너무 즐거웠거든요. 전 즐거운 일이 끝날 때면 늘 섭섭해요. 나중에 더 즐거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장담할 순 없으니까요. 게다가 즐거운 일이 계속되는 일은 잘 없잖아요. 어쨋든 지금까지 전 그랬어요. 하지만 집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면 기뻐요. 아시겠지만, 전 한번도 진짜 가정에서 살아 본 적이 없거든요. 진짜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다시 기분 좋은 통증이 밀려와요. 어머, 너무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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